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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네 삶은 아주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을 거라고.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어둠 속에서 걷기만 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동의한다. 이 탑은 하나의 긴 터널이며, 나는 이 터널을 밝힐 등불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
_시아라_하나에서 랭커까지.
하나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고, 사고하는 존재이며, 기쁨을 알고, 슬픔을 안다. 삶의 부조리함을 알고 있으며, 무엇이 그른 일이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안다. 나는, 나의 삶을 가지고 있다. 안다. 이것은 고백이 아니다. 오래되어 무뎌진, 작은 습관일 뿐. 누군가 매일 밤, 하느님께 기도하듯이, 매일 밤 나에게 고백을 했다. 너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면 한결 위로가 됐다. 그 순간만큼은 내 의지대로 삶을 움직이는 것 같았으니까.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주 어릴 때 맡겨진 고아원은 난방을 잘 해주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방이 추운지 몰라서였다. 우리가 이렇게 사회적으로도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어요, 따위의 멘트를 위한 허울뿐인 고아원. 내 이름도 하나 모르는 보모. 무관심 속에서 지친 아이들은 화풀이 대상을 찾았고, 불행히도, 나는 그 곳에서 가장 약한 아이였다. 그러니 삶은 곧 생존이었다. 나는 매일이 위태로웠고, 그 위태로움을 경멸했다.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고, 무뎌지게 만들고, 자발적으로 타인의 그림자가 되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이 오래된 내 삶의 방식은 여기서 시작했다. 위태로운 삶으로부터의 탈주. 그리고 생존.
감정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의 기관과도 같은 것이라, 쓰지 않으면 퇴화됨을 알고 있다. 그것은 쓰지 않는 근육이 점점 약해지는 것과도 같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선별되었음에도, 탑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우는 법을 잊었다. 화를 내는 법도 잊어버렸다. 웃는 방법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을 잊었다. 쓰지 않으면 퇴화됨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막지 않은 것은 그 편이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는 운동을 싫어한다. 쓰지도 않는 근육을 굳이 움직여서, 퇴화를 막는 것. 그것은 너무 아픈 일이다.
탑을 오르는 과정은 그저 생존의 연장선상이었다. 특별히 아픈 일도, 기쁜 일도 없는 날들의 연속. 나는 웃을 수는 있으나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고, 슬픔을 알고 있으나 울지 못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타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가여운 인형. 그게 랭커가 되기까지의 내 모습이었다.
탑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했을 때를 떠올려본다. 그때의 나는 웃고 있었던가, 울고 있었던가.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주문처럼 매일 밤 외웠던 작은 고백을 조용히 읊조렸다는 것. 나는 살아있고, 사고하는 존재이며, 기쁨을 알고, 슬픔을 안다. 삶의 부조리함을 알고 있으며, 무엇이 그른 일이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안다. 나는, 나의 삶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나는 살아있다.
_작은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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